다이아몬드 위의 전열보병들 – 야구와 전쟁의 문법

야구는 미국의 정체성을 내포하고 있는 미국의 국기(國旗)와 같다. 20세기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 자크 바르죙(Jacques Barzun)은 “미국의 마음과 정신을 알고자 하는 이는 야구의 규칙과 실상을 배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의 동판에도 새겨진 이 문구는 미국 사회에서 야구가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국가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핵심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축구가 공격과 수비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유동성을 강조하는 흐름의 스포츠라면, 야구는 철저하게 공격과 수비가 분리된 턴제 스포츠이다.

출처 : 위키피디아
그리고 이는 놀랍게도 전쟁과 그 형태가 유사하다. 남북전쟁 이전에는 주로 ‘전열 보병’ 전술이 효과적인 시대였다. 전열 보병 전술은 당시 사용되던 머스킷의 낮은 정확도와 느린 재장전 속도라는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탄생한 전략이다. 개별 사격으로는 적을 맞히기 어렵기에, 수백 명을 2~3줄의 긴 횡대로 밀착시킨 후 동시에 격발하여 특정 구역에 탄막을 형성함으로써 살상력을 극대화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 전술은 근대 초기 전쟁을 상징할 정도로 효과적이었고, 전쟁이 벌어지면 양측이 서로 번갈아 가며 총을 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한쪽이 총을 쏘면 맞고 이후 다른 쪽이 총을 쏠 차례가 되는 패턴은 마치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며 진행하는 턴제 스포츠와 그 방식이 매우 유사하다.
이 외에도 전쟁과 야구는 여전히 유사성을 찾아볼 수 있으며, 야구의 역사와 위상을 이야기할 때 전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특히 남북전쟁은 야구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다. 전쟁을 거치며 야구에 전쟁의 요소가 이식됐고 자연스럽게 두가지의 전혀 다른 개념이 하나로 동기화됐기 때문이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어난 야구 열기. 이 열기를 뜯어보면 야구와 전쟁이 어떻게 서로의 문법을 공유하며 닮아갔는지, 그리고 그 유사성이 야구라는 스포츠의 본질을 어떻게 규정했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역사의 이면에 가려진 다이아몬드 속의 전쟁 유전자를 추적하고자 한다.
야구와 남북전쟁 : 전미로 퍼져나간 야구의 열기

1860년대 야구와 링컨 등 대선 후보들의 모습이 담긴 정치 풍자 만화 – 출처 : Baseball Hall Of Fame
야구의 프로화는 20세기에 시작됐지만, 실제 야구가 대중적으로 퍼진 것은 19세기이다. 판화 회사인 ‘Currier and Ives’는 1860년 미국 대선을 몇 달 앞둔 시점, 에이브러햄 링컨과 야구를 중심으로 후보들의 공약을 석판화로 그려냈다.
복잡한 정치적 메시지를 야구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정말 보수적으로 잡아도 최소한 남북전쟁 발발 1년 전인 1860년에는 이미 야구가 미국인들에게 낯선 스포츠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야구가 파생되고 전파된 과정은 어땠을까? 18세기에 영국의 국기(國旗)로 자리 잡았던 크리켓은 초기 유럽 정착민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보다 현대적인 형태의 야구로 바뀐다. 1840년대와 50년대에 걸쳐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야구는 당시 ‘뉴욕식 야구(오늘날 즐기는 야구의 조상)’와 ‘매사추세츠식 야구(남북전쟁 이후 소멸)’가 가장 큰 인기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야구가 대중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했지만, 그 규칙과 플레이 방식이 제각기였다고 유추할 수 있다.
야구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뉴욕, 브루클린, 필라델피아, 보스턴과 같은 북동부 도시에서만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며 전국적으로 야구의 열기가 확산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극적인 변화가 발생한 것일까? 바로 전쟁이 발발하자 북군 지휘부가 수백만 명의 병사들이 겪는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야구를 장려한 것이 원인이다.

1862년의 그림으로, 남군 감시병들이 보는 앞에서 야구를 하는 북군 포로들을 묘사하고 있다. – 출처 : Baseball Hall Of Fame
특히 전쟁 초기 포로수용소에 갇힌 병사들에게 야구는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북군 병사들은 남부군의 포로수용소로 끌려갔다. 노스캐롤라이나주 솔즈베리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교환을 기다리던 북군 병사들이 ‘뉴욕식 야구’로 무료함을 달래기 시작했다.
경비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북군 포로끼리 진행되던 야구 경기는 어느새 거의 매일 북군 포로와 남군 경비병 간의 경기가 펼쳐질 정도로 큰 인기를 끈 것이다. 실제 당시 솔즈베리 포로수용소에서 화가이자 병사였던 오토 뵈티허가 석판화로 그 모습을 기록하여 전한 바 있다. 또 드물게 북군 포로들이 자신들을 잡아 온 남군 사람들과 야구하며 경기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 다른 일화는 야구 경기 중 총격전이 발생하고 포로로 잡혀간 사건이다. 1862년 텍사스 알렉산드리아에서 펼쳐지던 병사들의 야구 경기가 적의 총격으로 인해 중단됐던 사건이 있는데, 당시 상황을 북군 병사 조지 퍼트넘이 다음과 같이 기록한 바 있다.
“갑자기 산발적인 총격이 발생하여 외야수 세 명이 큰 피해를 보았고, 중견수는 포위됐으며 좌익수와 우익수는 간신히 돌아왔습니다. 공격은 큰 어려움 없이 막아냈지만, 우리는 중견수뿐만 아니라 텍사스주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유일한 야구공까지 잃었습니다.”
야구하다가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야구는 병사들의 일상에 밀접했다.

1863년에 찍힌 분열하는 부대 뒤에서 야구를 즐기는 병력들의 사진 – 출처 : Baseball Hall Of Fame
전쟁은 1865년에 들어서며 종전됐고, 병사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전쟁터에서 즐기던 야구를 하면서 전국에 야구가 대중화된 것이다. 전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월트 휘트먼’이 “야구는 우리의 게임, 미국의 게임이다. 야구는 우리가 상실한 것들을 회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언사를 남기며 야구가 전쟁 이후의 국가적 치유와 연방 유지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기대를 드러냈다.
또 1866년 [시카고 트리뷴]은 ‘야구 시대의 도래’라고 일컬었을 만큼 남북전쟁을 기점으로 야구는 높은 인기와 국기(國旗)로서의 그 위상을 구가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은 야구라는 놀이를 물리적으로 퍼뜨렸을 뿐만 아니라, 전장 특유의 의사결정 방식과 전술적 논리까지 야구의 규칙 속에 깊숙이 이식했다.
전쟁의 문법, 야구로 스며들다
전쟁을 거치며 야구의 인기가 퍼져나갔을 뿐만 아니라, 야구가 전쟁의 요소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또 생사가 오가는 전장의 긴박한 의사결정 구조를 야구의 규칙 속에 내면화시켰다. 야구의 공수 교대는 단순히 쉬는 시간이 아닌, 공격과 수비의 턴을 바꾸는 시간이면서 지휘부가 다음 타격 대상을 선택하는 전략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야구가 전쟁을 거치면서 인기를 얻고 전미로 그 영역이 넓어진 것은 표면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단순히 전쟁이 야구의 인기를 올렸다는 현상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야구라는 스포츠에 전쟁의 유전자가 이식됐다는 그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이런 본질은 현대 군사 이론인 OODA 루프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증명된다.


OODA 루프는 현대 전략 이론의 권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미 공군 대령 존 보이드가 고안한 의사결정 모델로서, 단순히 “빨리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수준을 넘어선 거대한 지적 체계다.
이 OODA 루프의 이론적 기틀은 보이드가 한국전쟁 당시 F-86 세이버가 기계적 성능이 밀림에도 불구하고 MiG-15를 상대로 10:1이라는 압도적 격추비를 기록한 이유를 분석하며 시작됐다. 분석을 통해 상대의 의사결정 주기보다 앞서나가는 빠른 전이의 중요성을 발견한 것이 이론의 시작이다.
이 OODA 루프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관찰 (Observe) : 오감을 동원해 외부 정보를 수집하는 단계
방향 설정 (Orient) : 루프의 핵심. 수집된 데이터를 유전적 유산, 문화적 전통, 과거 경험 등에 비추어 맥락화한다. 기존 모델을 파괴하고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 ‘창조적 파괴’가 여기서 일어난다.
결정 (Decide) : 분석된 상황을 바탕으로 가설이나 대안을 수립한다.
행동 (Act) : 결정을 물리적 행위로 옮기고 그 결과를 다시 환경에 투사한다.
전쟁 이론에서 출발했지만 OODA 루프는 비즈니스뿐 아니라 경쟁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전쟁은 인류 문명의 태초부터 함께한 원초적인 경쟁 행위기 때문이다. 경쟁이 있는 곳이라면 OODA 루프는 효과적으로 작동하기에, 당연히 야구에서도 OODA 루프는 작동한다. 야구에 OODA 루프를 빗대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것이다.
관찰 (Observe) : 투수와 타자가 서로의 수비 배치와 성향을 살피는 단계
방향 설정 (Orient) : 과거 데이터와 현재 볼 카운트를 분석하여 상황을 인식하는 단계
결정 (Decision) : 감독의 사인에 따라 작전을 확정하거나 투수가 던질 공을 선택하는 단계
실행 (Action) : 실제 투구와 타격이 이루어지는 플레이 단계
시간제한이 없는 스포츠인 야구의 턴제 구조는 지휘부(감독 등)가 개입하여 상황을 통제하고 다음 수를 계획할 수 있는 전술적 여유를 제공한다. 매 순간 작동하는 야구의 OODA 루프는 야구가 전쟁의 요소가 반영된 스포츠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특성 덕분에 야구는 루프가 한 번 돌 때마다 지휘부가 개입하여 방향을 수정할 수 있는 전략적 비대칭성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는 마치 현대 지휘 통제 시스템인 ‘C4I’ – 지휘 Command), 통제(Control), 통신(Communication), 컴퓨터(Computer), 정보(Intelligence) – 가 공격이 끝난 전장의 안개 속에서 다음 명령을 내리기 위해 확보하는 전술적 휴지기를 연상케 한다. 지휘부는 매 루프가 끝날 때마다 방향을 수정하고 검증하며 상대보다 한발 먼저 전술적인 이점을 차지하기 위해 행동한다.

OODA 루프가 고안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F-86 세이버 – 출처 : Planes Of Fame Musieum
이를 다시 야구에 대입해 보자. 야구는 수싸움의 스포츠다. 모든 상황에서 상대 선수, 팀과의 수싸움을 펼친다. 모든 플레이는 수싸움의 결과이고, 수싸움을 통해 상대가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고, 우리는 이득을 취하는 것에 열중한다. 상대보다 빠르게 상황에 맞춰 대응할 수 있는 팀, 즉 OODA 루프를 통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팀은 전술적 우위를 점할 수 있으며, 이는 전력상 열세인 팀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야구와 전쟁의 유사점은 야구 용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배터리(Battery)’는 야구에서 투수와 포수의 조합을 말하는 말이다. 그 유래는 헨리 채드윅이 투수의 화력과 이를 받아내는 포수의 조합이 마치 포병 부대의 화력을 연상케 한다며 포병 부대를 일컫는 ‘포대(Battery)’에서 단어를 가져와 쓴 것이 그 기원이다.
또 ‘로스터(Roster)’라는 단어는 선수 명단을 뜻하는데, 이는 네덜란드어 ‘석쇠(Rooster)’에서 유래한 것이다. 종이 위의 줄무늬가 석쇠처럼 보여서 명단이라는 뜻이 됐고, 이후 군대 근무 명부로 널리 쓰이다 야구에도 정착된 사례다.
마지막으로는 ‘스카우트(Scout)’이다. 16세기부터 적의 움직임을 살피는 ‘정찰병(Scout)’이라는 군사 용어로 쓰였으며, 이것이 재능 있는 선수를 찾는 역할로 자연스럽게 이식됐다. 야구는 야구 경기가 가진 본질뿐 아니라 용어까지, 많은 면에서 전쟁과 유사성을 갖고 있다.
결론

미네소타 트윈스의 홈 경기 시작 전 하늘 위로 FLYOVER를 하는 미 공군 – 출처 : 미 공군
오늘날 야구는 미국을 중심으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4번 타자의 담장을 넘기는 홈런부터 마무리 투수의 모두를 압도하는 등장, 선발 투수의 탈삼진 쇼 등 야구장 안팎에는 팬들을 즐겁게 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볼거리와 먹을거리와 가득한 야구는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취미가 됐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야구는 태동기부터 전쟁과 깊은 연관이 있었으며, 여전히 그 잔재와 유사성이 현대 야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태초의 야구가 탄생한 이래 남북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전쟁의 문법과 논리가 이식됐다. 그리고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어난 야구의 열기는 전미로 퍼지며 전쟁으로 갈기갈기 찢긴 미국의 상처를 치유하는 문화이자 흩어졌던 연방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연대를 형성했다.
전쟁은 오늘날 현대 야구의 시작점을 든든히 지탱하는 반석이 됐다. 야구는 전쟁의 기억을 스포츠라는 형식으로 옮겨놓은 고도의 문화다. 마치 전쟁의 전열 보병과 같이 서로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가며 전술을 구상하고, 기록을 통해 전력을 평가하며, 전선을 나아가듯 다음 베이스로 전진하며 홈까지 돌아오는 야구의 문법은 미국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와 규율이 묻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