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왜 현대 유니콘스는 인천을 버렸는가?

좋아하는 스포츠 구단을 고르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가족력, 스타플레이어의 활약 등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지만, 가장 고전적이면서 강력한 이유는 바로 지리적 연고일 것이다. 연고지가 안겨주는 지리적 유대감과 소속감은 여러 개인을 ‘우리’라는 단체로 묶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된다. 연고지 팬들과 깊은 유대로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한국 프로야구. 하지만 이 견고한 역사 속에도 연고지를 등졌던 두 번의 이례적인 사례가 있었다.
그 첫 사례는 1985년 OB 베어스였다. 지금은 LG 트윈스와 함께 잠실 야구장을 공유하는 서울의 주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1982년 창단 당시에는 KBO의 중재로 3년간 대전을 임시 연고지로 사용했다. 그리고 3년 뒤 약속대로 서울로 올라가며, 우리가 아는 빙그레-한화 이글스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애초에 협회의 제안으로 잠시 머물다가 이사한 경우라 서울-대전 팬들의 갈등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갈등과 파국은 다음 사례에서 발생했다. 인천을 연고지로 한 현대 유니콘스의 수원 입성이었다.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를 시작해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를 거쳐 1996년 KBO에 입성한 현대 유니콘스. 1990년대 말 압도적이었던 모기업의 재력으로 유명 선수들을 영입하며 1998년에는 창단 첫 우승까지 차지한 당대의 강팀이었다. 그랬던 유니콘스가 2000년 갑작스레 연고지인 인천을 버리고 서울 입성을 강행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삼청태현이라 불리는 인천 프랜차이즈의 절단과 SK-SSG와의 정통성 논쟁의 시작, 그렇다면 왜 현대 유니콘스는 인천을 버렸을까? 그리고 유니콘스는 왜 서울 입성을 강행했으나 수원에 자리 잡게 된 걸까?
1999년 인천의 상황, 그리고 유니콘스가 떠난 이유

1993~99년 KBO 구단들의 홈관중 수. Y축에서 1.0은 100만 명을 의미한다. 당시 KIA는 해태, 두산은 OB였다.
1995년 최초로 500만 관중을 돌파하며 호황을 이어갔던 프로야구, 그러나 1997년 말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그 분위기는 빠르게 식어버린다. 이 여파는 1998년 통합 우승을 차지한 유니콘스에게 더욱 가혹하게 다가왔다. 1996년 47만 명에 달했던 홈 관중 수가 단 2년 만에 31만 명으로 급감했기 때문이다.
특히 ‘돈으로 우승을 샀다’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했던 유니콘스에게 흥행 참패는 치명적이었다. 대표적으로 1997년 말, 재정난에 허덕이던 쌍방울 레이더스로부터 현금 9억 원과 선수 2명을 내주고 포수 박경완을 데려온 현금 트레이드는 당시 야구계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이처럼 리그의 특급 선수들을 현금으로 싹쓸이하며 승리라는 결과물은 얻어냈지만, 이를 회수해야 할 창구인 입장 수입이 토막 나면서 구단 운영의 가성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게다가 1999년 인천 경제를 지탱하던 대우 그룹이 부도를 맞이하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 인천 지역 관중 동원력이 더 떨어질 게 자명해진 것이다. 구단의 모기업인 현대전자 역시 1998년 LG전자 인수 후 적자를 이어가던 상황이라 태평히 장기 투자를 노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한편 비협조적인 인천광역시 지자체의 태도도 문제였다. 유니콘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숭의야구장 자체가 무허가 건축 시설이라 쉽사리 개보수를 하는 게 어려웠다. 구단 인수 후 유니콘스도 나름대로 야구장 잔디와 전광판을 리모델링하며 체질 개선에 노력했으나 1934년에 지어진 노후화 시설의 한계는 명확했다.
이 상황을 벗어나고자 구단은 당시 인천시장이었던 최기선을 포함해 여러 차례 인천시에 협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축구, 농구 연고 팀에도 관심이 없었던 인천시 측은 유니콘스에도 무관심으로 대응할 뿐이었다.1 동시에 재계 1위라는 자존심과 수도의 상징성을 이유로 서울 입성을 주장하던 모기업 내 여론은 커져만 가고 있었다. 인천을 여유롭게 넘기는 관중 동원력 역시 흠모의 대상이었다.
물론 현재 관점에서는 굳이 제3의 서울 구단이 되는 것보다 40년이 넘는 인천 프랜차이즈를 지키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은 유명해진 송도 신도시를 비롯해 여러 신도시의 설립으로 인천도 나름 자금력을 갖춘 도시가 되었으나, 20년도 더 걸릴 미래를 기다리기에는 세기말 유니콘스에 여유로움이 없었다. 결국 유니콘스는 2000년 1월 모기업 차원의 주도로 연고지를 인천에서 서울로 옮기겠다고 공언했다. 그것도 선수단과 팬들의 동의도 없이. 역사의 분기점이 시작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맞이한 새천년의 KBO, 그리고 인천 SK

20세기 말 대한민국 재계를 뒤흔들었던 현대그룹 후계자 다툼, 일명 왕자의 난
인천을 배신한 유니콘스를 향해 수많은 팬이 비난했으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유니콘스의 서울 입성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단 돈이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이미 서울 연고였던 트윈스와 베어스는 현대의 서울 진입을 강력히 반대했다. 지명권, 관중 수입 등 여러 문제에 큰 손 한 명이 더 끼면 더 불편해지니까. 그러자 KBO는 중재안으로 유니콘스가 서울 구단들에 54억 원이라는 거액의 연고권 침해 보상금을 지급하는 조건을 제시했다. 그런데 당시 현대그룹 내 경영권 승계 분쟁(일명 ‘왕자의 난’)과 IMF의 여파로 그룹 자금 사정이 급격히 악화되며 이 돈을 못 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게다가 임시로 사용하려 했던 목동 야구장이 아마추어 전용 구장으로 지정되어 사용할 수도 없게 되었다. 서울시와의 협의 및 개보수가 필요한 상황이었으나 당장 쓸 홈구장이 없던 유니콘스에게는 이것마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결국 최후의 보루로 “욕을 먹더라도 다시 인천으로!”를 외치려 했으나, 역시나 불가능했다. 바로 SK 와이번스의 창단 때문이었다.


유니콘스가 서울 입성을 이유로 인천 연고권을 KBO에 반납한 사이, 2000년 3월부터 SK 그룹이 해체한 쌍방울 레이더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인천에 창단한 것이다. 재밌는 것은 SK 그룹이 인천에는 연고가 없어 수원 또는 서울에 창단하고 싶어 했으나, KBO의 권유로 인천에 정착했다는 점. 결국 퇴로마저 막힌 유니콘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수원 야구장을 임시 거처로 삼게 됐다. 그리고 이때부터 유니콘스는 “내년에는 반드시 서울로!”를 외쳤으나 그들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맞이한 새천년의 KBO, 연고를 옮긴 유니콘스는 역사상 최고 성적인 91승-승률 0.695를 찍으며 2번째 통합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그러나 비극은 멈출 줄 몰랐다. 모기업인 현대전자가 이듬해 부도났으며, 그들을 이끈 정몽헌 회장이 2003년 불법 대북 송금 관련해 수사받던 중 자살한 것이다. 그렇게 부자 구단의 역사는 마침표를 찍는다.
초라했던 왕조의 마지막 그리고 수원 현대가 남긴 의의


20세기 엄청난 자금력으로 리그를 흔들던 유니콘스는 2001년부터 완전히 다른 팀을 변모하게 된다. 모기업의 부도로 자금력이 상당히 축소하여 선수를 팔며 구단 운영비를 충당하는 팀으로 바뀐 것이다. ‘임시’ 연고지였던 수원 팬들의 저조한 지지로 관중 동원력이 더 떨어졌음은 물론이다. 실제로 유니콘스는 2001년부터 인천의 새 주인이 된 와이번스에 단 한 번도 홈 관중 수를 이기지 못했다.
임시 연고지라고 기다려줄 수 있는 것도 1~2년이지, 협회와 타 구단들도 서서히 화를 내기 시작했다. 돈도 돈인데 수원야구장은 와이번스의 제2 구장이자 그들의 연고 권역에 속하는 곳이었다. 즉 임시 연고지마저 남의 땅이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돈이 말라가는 유니콘스에 서울 입성의 꿈은 점점 희미해져 갔으며 결국 2003년 해당 이유로 신인 드래프트 1차 지명권이 박탈되었다. 그렇게 유니콘스는 2차 지명만으로 신인 수급을 이어가야 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이 가난한 살림에도 2003-04년 연속 통합 우승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없는 살림에도 뛰어난 성적을 거둘 정도로 선수단의 기량과 투지, 김재박 감독을 위시한 코치진의 실력은 대단했으나 모기업은 더 이상 그들을 지킬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2007년 선수단을 향한 최후의 통첩이 떨어졌다. 범현대가의 기업 운영 포기 선언이었다.


KBO는 리그 전체의 규모 축소를 막기 위해 상황 유지를 택했다. 급히 26년간 모아둔 야구 발전 기금 140억 원을 쏟으며 유니콘스 살리기에 들어갔다. 정확히는 호흡기라도 잡아두기였다. 이렇게 유니콘스는 불안정한 상황에서 시즌에 돌입했다. 구단 상황이 막장인데 경기가 제대로 될 리가 만무. 선수단은 분전을 이어갔으나 끝내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며 최종 6위로 시즌을 마쳤다. 그리고 당해 시즌 1위 및 통합 우승은 스포테인먼트를 앞세워 인천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인천’ SK 와이번스였다.
사실상 모기업도 부재했던 유니콘스의 2007시즌은 초라하게 종료되었다. 7년간 서울 입성을 노린 그들의 도전은 끝내 실패했으며, 구단은 2008년 임시 연고지 수원에서 해체를 맞이했다. 인천 팬들에게 큰 상처를 안긴 유니콘스 왕조의 마지막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리고 8개 구단 체제였던 2000년부터 홈 관중 6-8-8-7-7-8-8-8위에 그칠 정도로 유니콘스에 무관심했던 수원 팬들의 마음을 끝끝내 돌리지 못했다. 그들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단 1,400여명 만이 방문했을 뿐이었다.


수원 현대 유니콘스가 남긴 역사적 의의는 상당하다. 돈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과 연고지 팬들의 마음을 단순한 성적만으로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데 있다. 화려한 우승 트로피조차 지역과의 신뢰라는 뿌리가 없으면 허망한 모래성에 불과했다. 구단과 연고지의 유대는 승리라는 결과물이 아니라, 그 지역에서 추억을 함께하며 쌓아온 시간과 정성이 빚어내는 하모니여야 하기 때문이다. 우승은 기록으로 남지만, 팬들의 사랑은 기억과 유산으로 남는다. 많은 이들이 본인들의 연고를 찾아가는 설 연휴에 스포츠 구단과 팬 모두 집의 소중함을 깨닫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현대 유니콘스의 야반도주를 경험한 인천광역시는 새로 입주한 SK 와이번스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쪽으로 태도를 바꾸게 된다. 2002년에 완공된 문학야구장이 현재까지도 꾸준히 리모델링되어 팬서비스를 다각화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